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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미국은 단파라디오를 통해 심리전을 벌이는데 그 대상에는 조선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영어도 잘 하고 이유야 어찌됬던 간에 독립운동 경력이 있던 이승만을 섭외해 일본이 패배하고 있고 독립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렸고 그걸 여운형, 송진우, 김성수 등의 민족진영 지도자들과 방송국 직원들이 듣고 퍼트리는데 당연히 일제에게 탄압받게 됩니다. 이 방송의 효과는 대단해서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이 패배할 것이란 걸 깨닫게 되었으며 조선에 전혀





고립시키도록 한다는 방침도 채택됐습니다.』 이 같은 결정사항은 동시에 반탁으로 발표된 조선공산당의 입장을 찬탁으로 변경시키는 자연스러운 방법이었다. 서씨의 증언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첫째, 조선공산당이 입장을 급히 바꾼 것은 소련 및 김일성의 「행동지침」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이 같은 지침을 박헌영이 직접 받아왔다는 점이다. 이는 소문과 추측으로만 전해져 온 역사적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이어 중점적으로 논의된 것은 삼상회의 두 번째 결정인 임시정부 구성문제였다.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이 논의에서는 임시정부 구성의 원칙이 마련됐습니다.



결정한다. 넷째 , 신탁통치 기간은 최고 5년 이내로 종결한다는 것이었다. 독립정부 수립이 유보되고 다시 신탁통치를 받게 된다는 소식은 전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목소리갰반탁』(신탁통치 반대)으로 모아졌다. 정태식 등 조선 공산당의 몇몇 간부들은 『만일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사실이라고 하면 우리는 절대로 반대한다. 5년은 커녕 다섯 달이라도 반대한다』고 했다. 박헌영은 공식의견을 말하지 않았지만 항상 『하루빨리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할 것』을 역설해 왔기 때문에 그 역시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좌익계열인 조선인민당은 『36년간 노예생활을



폭격을 지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안두희는 고향 선배이자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조직의 책임자인 김구를 암살하는 정말 이해 안되는 짓을 하게 되죠. 항간에는 안두희의 이런 행위가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안두희는 서북 출신입니다. 황해도 출신으로 김구와 동향 사람이고, 김구가 이승만 암살을 개인적으로 지시할 정도로 크게 믿었던 사람이었거든요. 당연히 기호 출신의 이승만따위의 명령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겁니다. 서북파가 가장 싫어하고 미워했던게 기호파였으니까요. 그래서 이승만이





덤이고요 여긴 박원순 장모가 산다고 알고있어요 조국문제는 또 어떻고요.. 조국은 진짜.. 그런 뻔뻔함은 역대정부중에 최악이었습니다.민주당 정의당이랑 손잡은 관변단체들 동원해서 어떻게든 버틸려고 안간힘을 썻었죠.. 자기들말로는 민주당이랑 상관없다하지만 어느정도 정치에 관심있는분이면 알거아닙니까??? 그사람들 그냥나온거아니라는거 프로 시위꾼들인거 물론 반대세력또한 만만치않았다는거 알아요 허나 그때의 핵심은 조국의 낙마와 동시에 조국의 범죄사실에대한 수사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가짜뉴스발언등등 문재인이 도덕적인건





동래 출신의 이상조. 간단하게 찾아본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더 심층적으로 찾아보면 엄청나게 나올거 같더라고요. 어쩐지 한국전 당시에 북한군이 경상도에서는 학살을 안한 것이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도 남로당 총책을 경상도 출신 다카키에게 맡기고 북한으로 넘어갔잖아요. 남로당 거점 지역이 전라도였는데 왜 전라도 사람이 아닌 경상도 사람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방법을 찾는 것뿐이었다. 31일 오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분국의 17명 상무위원이 참가한 집행의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서씨에 따르면 이 회의는 북한에서 4차 확대 집행회의라고』불린다.) 서씨의 증언. 『먼저 당 조직부국장 허가이가 삼상회의 결정을 보고했습니다.(허는 3차 확대 집행위에서 부국장으로 선출됐다.) 이어 신탁통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당과 근로 대중단체를 확대, 강화하고 삼상회의 결정내용과 의미를 정확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서





}); 소련의 의도를 설명해주어야 할 군정의 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아직 평양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평양에 도착한 당일 박-김 회동은 개괄적인 남북정세 교환 및 입장전개에 그쳤다. 서시의 증언. 『사일 회동에서 김일성은 북조선분국 2, 3차 확대집행위원회 개최상황, 조선민주당 창당 등 이북의 정세를 실명했습니다. 박헌영은 서울중앙내부에 반탁입장이 거세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 때 분국은 이남에서 신탁통치문제가 소란스럽고 조선공산당도 반탁입장을 밝힌 것을 알고 있었어요. 김일성은



청원운동이나 지지운동을 전개하는 방법 등이 채택됐습니다. 또 조선공산당과 북조선 분국이 46년1월2일 찬탁입장을 밝히고 다음에 단체별로 군중집회를 갖고 진정서를 내기로 했습니다. 또 2주일 이내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수 있도록 서울의 조선공산당과 이북의 북조선 분국이 소 군정과 미군정에 청원서나 진정서를 보내는 문제도 논의됐습니다. 조선공산당은 특히 주도적으로 나서 반탁진영 내부를 분열시키고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여론을 확산시켜 반탁진영 자체를



그랬다가 기호파 타도를 외치는 서북파와 공산주의 진영이 연합을 해서 임정내 기호파 세력들을 모조리 축출하게 되고 기호 출신들은 임정에서 전부 퇴출당하게 됩니다. 이런 서북파의 지역파벌에 치를 떨고 독립운동에서 손을 떼고 친일로 갈아탄 사람이 그 유명한 윤치호입니다. 독립협회 4대 회장을 한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지역감정에 치를 떨고 독립운동에서 손을 떼게 되죠. 해방 이후에 김구와 이승만이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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